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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zzyz's review
여러 블로그를 돌아다니다 보니 혈의 누에 대한 리뷰가 참 많이도 올라왔더군요. 저명 블로거이신 ozzyz님이나 corwin님 같은, 훌륭한 리뷰도 볼 만했고, 영화보다 풍부한 생각할 거리들을 제공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반골 기질이 넘쳐나는 저로서는 모든 리뷰에 동의해줄 수는 없죠. 어떤 부분까지는 공감할 수 있었지만, 세세한 부분에 이르면 해석(이렇게 말하면 거창해지지만)이 달라지는 건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1. 웰메이드 필름이라는 평에 대해 웰메이드 필름-이라는 표현에 대해 다들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렇습니다. 그건, 영화를 이루는 모든 요소가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장인의 솜씨를 얻어 이루어져야 하며, 뭔가가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은 영화를 말하는 것이다- 라고요. 배우들의 연기가 두루 괜찮아야 하고(그 중 누군가의 카리스마가 다른 배역을 압도해서도 안 되죠), 주제의식이 지나치게 영화를 짓눌러서도 안 되며, 조명/의상/촬영/편집/음악 기타 등등 영화를 영화답게 하는 모든 요소들이 제 몫을 다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버는 금물이구요. 물론 이런 걸 다 해내는 영화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웰메이드 필름이라는 표현이 찬사에 가까운 것이라면, 제가 말씀드린 여러 가지 항목의 평점이 A+은 아니더라도 A-는 되어야 가능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한국영화에 웰메이드 필름이 있다면, 단 하나 '살인의 추억'이 있을 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혈의 누'는 어떻냐구요? 들여다볼까요. 2. 일단 주제의식부터- 대중의 동의에 기초한 독재, 부조리? "따져보면 <혈의 누>는 <그때 그 사람들>들보다 오히려 훨씬 더 노골적으로 근현대사에 대해 발언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때 그 사람들>이 누군가를 조롱, 혹은 옹호했느냐에 관계없이, '그때 그 사람들' 과 '그때 우리들' 을 구별 짓는 수사법에서 이미 그 한계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면, <혈의 누>는 집권층의 부조리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결국 대다수 민중들의 자발적 동의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매우 위험하고도 논쟁적인 화두를 제공하고 있다. " - ozzyz님의 리뷰 중에서 저는 일단 생각이 다릅니다. ozzyz님은 많은 장점을 가진 리뷰어이시지만, 가끔 과도한(?) 정치성을 강조하시는 면이 있더군요. 하지만, 이 영화에 그런 善解를 해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해요. 집권층의 부조리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민중의 자발적 동의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명제를, 영화와 분리해서 사고하면, 다름이 아닌 파시즘입니다. 그런데, 조선시대에 파시즘적 징후가 있었다고 할 수 있나요? 아, 그것과는 별개로, 영화 내적으로도 그러한 파시즘적 징후가 존재했던가요? 제가 보기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강객주의 죽음에 있어서 민중의 이기적인 태도(대부분이 빚과 관련될 일이겠죠)는 집권층의 정치적 책략과 맞물려 그의 죽음을 방관, 방조하는 수준에 머물렀으며, 그조차도 귀신의 한풀이를 두려워할 정도의 집단적 트라우마를 생산해냅니다. 부조리를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은 전혀 민중에게서 유래한 것이 아니죠. 그들은 단지 침묵했을 뿐이며, 그것은 사소한 경제적 이득 때문이었습니다. 혹은 권력에 대한 공포가 그 두께를 더했을 뿐이거나. 3. 중세성과 근대성의 공존, 혹은 비극? 이 영화가 슬리피 할로우에서 많은 설정을 빌려왔다는 것은 암암리에 알려진 사실입니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설정, 비슷한 주인공(수사관- 마녀, 수사관- 무당의 등장 역시 유사해보이는군요), 심지어는 비슷해보이는 주제의식까지. 하지만 조선시대에 보편적인 중세성을 부여하는 것 역시 부질없는 짓이며, 그를 통해 중세성과 모더니티, 그 동거와 대립의 비극을 관조하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역사적인 발전과정에 있어 서양과 동양은 그 양상을 달리합니다. 암흑시대라던 중세시대에서 근대성의 싹을 키워낸 서구와, 정적이고 순환론적인 역사과정 속에서 일방적으로 근대성을 주입당한 동양의 경우가 같을 수는 없겠죠.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영역이 바로 거깁니다. 강객주는 조정의 실력자인 누군가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어서, 그의 힘을 빌려 섬에 제지소를 세울 수 있었죠. 그런데, 그 실력자인 누군가가 천주학쟁이로 탄핵되어 실각하게 되자, 강객주도 그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천주학쟁이로 몰리게 된 겁니다. 코윈님은 제지소를 '근대성'의 상징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제지소는 근대성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힘은 서학이지요. 혹은 실학. 요컨대 제지소는 '수입된 근대성'이라는 거죠. 조선의 딜레마는 이 근대성과 함께 묻어온 종교라는 놈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선진화된 서구의 과학, 기술은 받아들이고 싶은데, 종교에 대해서만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이 둘에 대해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아예 서학 자체를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는 무리들도 있었을 테구요. 이 영화가 건드려볼 만한 주제의식이라는 건, 수입되어온 근대성에 대한 조선집권층의 딜레마와, 민중이 겪는 딜레마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 숨어있네요. 정리하면, 이 영화를 '중세성 VS 근대성'의 구도로 이해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기에는 그 근대성의 정체가 너무나 불충분하기 때문이죠. 강객주가 서학쟁이로 몰리게 된 데에는, 선진적인 (아마도 서구의 것일) 제지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그럴 듯한 혐의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고, 수입된 근대성이라는 놈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이 필요했을 텐데, 영화는 그저 장르문법을 좇아가는 데 급급했기 때문입니다. 차승원의 배역 역시 모순스럽기 짝이 없는 배역입니다. 그는 서학의 세례도, 근대성의 교육도 받지 않은 한낱 조선의 군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그가, 과학수사를 외치는 조니 뎁에 비길 만한 인물이 될 수 있을까요? 말도 안되는 얘기라고 생각해요. 엉성한 설정의 결과죠. 4. 나머지 음악은 코윈님 말씀에 동의. 라흐마니노프만 계속 틀어대는 건 문제가 있더군요. 식상해지기 쉬워요. 옷은 그럭저럭 고급스러워보이더이다. 스캔들 이후로 고급 옷을 입어대는 게 트렌드가 된 모양인데, 많이 호화롭지는 않았지만 군관이 입는 복장 치고는 과한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나머지는 그냥 그렇네요. 만신의 연기는 안타까웠고, 결정적인 장면에서 차승원의 박력 부족은 언제나 그렇듯이. 지성의 연기, 캐릭터. 모두 맘에 안 듭니다. 처음 나올 때부터 뭔가 한 껀 할 분위기 물씬한게, 그리 좋아보이지 않더군요. 결론은? 뭐, 그냥 그랬다입니다. 하드고어스럽던 몇 장면은 기억에 남을 만 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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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카테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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