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중략>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중략>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시집 뒤에 실린, 작고한 김현선생의 평가대로 그로테스크 리얼리즘의 시인인지, 혹은 심야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 젊은 천재인지
읽으면 읽을 수록 제 나름의 평가를 내리기엔 아직 그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만 들게 하는 기형도의 시, < 입 속의 검은 잎>입니다.

지난 몇년간, 그리고 앞으로도 당분간은 개인적인 일들이 주된 관심사가 되어 왔고 될 것이라는 예상 때문인지
갑자기 이 시의 구절들이 뇌리를 맴도네요.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꽤 오래 전부터, 어쩌면 스무살 이후부터 저는 저를 둘러싼 사건들로부터 주변부에 있기를 고집해왔던 것 같습니다.
변방이라는 건 편리한 것입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 팔짱을 낀 채 몇 마디 코멘트만 날려주면 되거든요.
그 몇 마디의 말조차, 치열한 고민이나 치밀한 조직화가 전혀 필요하지 않은 무책임한 말들이니까요.

'먼 지방'이라는 단어는 그 다음 행의 '먼지의 방'과 음성학적으로 묘한 조응을 일으킵니다. <나>를 둘러싼 물리적 현실의
비루함 속에서, 화자는 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다른 시에서 '총성이 울릴 때마다 플라톤을 읽었다'('대학시절')고 고백했던
것처럼, 이 시의 화자 또한 플라톤을 읽으며 이데아를 꿈꾸었는지도 모르지요.

현실의 모든 사건들로부터 변방으로 몸을 숨긴 채, 이상만을 좇던 화자는 그러므로 <그>를 한번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그>가 누구인지, 혹은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저는 플라톤 철학의 예를 따라
이데아의 대립하는 개념으로서의 Nomos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즉, 인간 이성 logos에 의해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실천적인 현실이지요. 또는 현실 인간 사회의 (자연법적) 규범이라고 할 수도 있구요.
그러므로 화자의 시대에 <그>는 화자가 더 먼 꿈을 좇는 사이에 죽어버린 민주주의를 비롯한 현실의 구체적인 정의를
 나타낼 겁니다.

오늘의 저는 이 시를 읽으며, 제가 만난 적이 없는 <그>를 생각합니다. 화자처럼 멀리 있는 꿈을 좇으려 했던 것도 아니지만,
어느새 서른의 나이를 넘긴지 한참인 지금도 개인적인 관심사 외에는 모든 사건으로부터 변방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으면서,
대체 이러한 변명을 언제까지 늘어놓아야 하는지 암담한 기분까지 듭니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설파하는 것처럼,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일단 내가 만난 적이 없는 <그>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저도 가까운 지방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변방에서 중심으로
끝없이 지향하지 않으면, 다시 몇년, 몇십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대답할
수 없어질 테니까요.
by 키치소년 | 2010/03/08 14:38 | kitsch, junk, 잡문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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